왜 전시를 하는가? — 그리고 어떤 전시를 할 것인가?

전시에 대해 1년 넘게 질문을 하고 다녔다.

내가 강의 들었던 사진전문가분들,
전시하시는 회화/유화/사진 작가님들,
관장님들,
큐레이터분들,
동료 사진 작가님들,
강의에서 만난 분들.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전시를 하십니까?"

이 질문은 전시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종이 한 장이 바꾼 생각

처음에는 고급 종이와 액자에 돈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용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인 한 분이 보여 주신
두꺼운 한지에 프린트된 꽃 사진을 보았다.
종이 한 장에 50만 원이라는 한지였다.

그 사진 앞에서 마음을 빼앗겼다.
집에 와서도 그 꽃이 아련거렸다.

꽃의 감성적인 자태가 종이의 질감과 만나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진심으로 갖고 싶었다.

그 경험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종이가 작품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그에 걸맞는 종이와 액자가 함께할 때,
작품은 더 값지고 보물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물질적 형식이 이미지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전시의 여러 얼굴

예술계나 교육계 등 현직에 있는 분들에게 전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경력, 승급, 전문가로서의 기록.
이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다.

그런데 은퇴 이후에도 전시를 하시는 분들이 있다.
은행에 넣어 둔 비상금을 아껴 쓰시면서.

그 중에는 이전에 전시했던 작품을 다시 거는 경우도 있고,
애써 초대작가라는 명칭으로 공간에 들어가
갤러리 액자를 빌려 전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각자의 사정과 동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자신의 작품이 진심으로 아까운 작품이라면,
그 작품을 담는 형식도 그에 맞아야 하지 않을까?


Lacan의 거울 앞에서

왜 전시를 하는가?

이 질문을 파고들면 결국 욕망의 구조에 닿는다.
Lacan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남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
남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것.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 행위에는 어느 정도 이 구조가 작동한다.

문제는 그 욕망이 작품의 질을 넘어설 때다.
작품 자체보다 전시를 했다는 사실이,
작가라는 타이틀이,
오프닝에 사람이 왔다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

전시는 작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확인을 위한 의례가 된다.

사진과 무관한 직함들 — (전)대표이사, 박사학위, 어느 대학 대학원 출신 — 이 전시장 작가소개나 이력에 등장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은퇴 후에는 쓸모가 사라진 직함들이다.

그것이 전시의 동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각자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내가 만약 전시를 한다면

만약 내가 한국에서 개인전을 한다면,
이런 전시를 하고 싶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안 하면 안 될 상황”

“주변에서 등을 떠밀어서 가까스로 하게 되는 전시”

작품이 먼저이고,
전시는 그 작품이 세상에 나가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때 비로소 따라오는 것.

이것이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작품의 수준이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평생 전시 한 번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어떤 이유로든,
남이 전시하려다 못하게 된 자리에 들어가서,
남의 액자를 빌려 하는 전시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나”와 “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전시란 무엇인가?

전시는 이미지가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행위다.

어떤 종이에 인화할 것인가?,
어떤 액자에 넣을 것인가?,
어떤 공간에 걸 것인가?,
어떤 빛 아래 놓을 것인가?.
이 모든 선택이 이미지의 의미를 바꾼다.

Roland Barthes가 사진의 noema를 "그것은-거기에-있었다(ca-a-ete)"라고 했을 때,
그 '거기'는 추상적 공간이 아니다.

사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바로 그 자리다.
한지 위의 꽃은 모니터 위의 꽃과 다른 존재다.

두꺼운 한지의 질감이 빛을 흡수하고 산란시키는 방식 자체가 이미지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전시를 한다면,
“작품이 물리적 세계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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