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나는 어떻게 사진을 찍는가?

AI 시대, 나는 어떻게 사진을 찍는가?

지금은 AI 시대다.
사진의 정의가 매일 갱신된다.

나는 동료 사진가들의 말을 자주 듣는다.

누군가는 자기는 필름을 고집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흑백은 은염 인화여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Photoshop을 일절 만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AI는 빛이 없으므로 사진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 진지한 발언이었다.

나는 그들의 입장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매체에 대한 충성은 한 시대의 미덕이었고,
어떤 미덕은 오래 들고 있을 가치가 있다.

다만 한 가지가 걸린다.

Adobe는 이미 Photoshop 안에 나노 바나나(Nano Banana)를 통합했다.
자기 사진 원본을 구십 퍼센트 이상 변형할 수 있는 도구가 일상의 작업대 위에 올라왔다.
그러니 "Photoshop까지는 괜찮지만 AI는 안 된다"는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야 할까.

디지털 후보정은 처음부터 변형의 행위였다.
변형의 정도가 임계점을 넘었을 뿐이다.
임계점은 매체의 종류를 가르지 않는다.
행위의 강도를 가를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필름을 쓰는 것이,
Photoshop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사진가의 진정성을 보장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매체는 도구다, 다만 중립적이지 않다

매체는 도구다.
그러나 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

필름은 서른여섯 컷이라는 제약과 인화의 무게를 가진다.
그 제약이 셔터를 누르는 결정의 밀도를 높인다.
한 컷이 한 컷이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디지털은 즉시성과 무한 시도라는 자유를 준다.
그 자유가 도시의 빠른 결을 포착하게 한다.
결정의 임계가 카메라 안이 아니라 모니터 앞으로 옮겨갈 뿐이다.

AI는 빛 앞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
그 가상성이 또 다른 사고의 영토를 연다.
기억의 합성, 꿈의 시각화, 통계적 평균으로서의 얼굴 같은 주제는 카메라 앞에 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매체는 각자 다른 사고의 결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매체도 그 자체로 진정성의 척도는 아니다.
진정성은 매체가 아니라 작업의 정직함에서 온다.

필름을 쓰면서 거짓을 말할 수 있고,
AI를 쓰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매체의 순도가 작업의 순도를 보증하지 않는다.

표현의 정확성이 먼저다

나는 매체를 고를 때 한 가지를 묻는다.
“이 작업이 묻고 있는 질문에 가장 정확한 매체는 무엇인가?”

시간의 두께를 담아야 하는 작업이라면 필름의 입자가 그 두께를 가장 잘 받친다.
입자는 시간의 흔적을 닮았다.

도시의 익명성을 다루는 작업이라면 디지털의 즉시성이 그 익명성을 가장 잘 잡는다.
셔터의 망설임이 사라진 자리에 우연이 들어선다.

기억의 합성과 변형을 다루는 작업이라면 AI의 가상성이 그 변형을 가장 잘 드러낸다.
가상성은 변형의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드러낸 채로 작업한다.

매체는 표현의 정확성에 봉사한다.
그 반대가 아니다.
매체에 표현을 끼워 맞추는 일은 도구가 작가를 부리는 일이다.
그 순서가 뒤집힐 때 작업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같은 작가가 어떤 작업에서는 필름의 무게를,
다른 작업에서는 AI의 가상성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는다.

매체의 다양성은 자기 분열이 아니다.
표현의 정확성을 향한 자기 조직이다.

AI가 모든 표현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AI를 도구함에 두는 일이 모든 작업을 AI로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AI가 가능한 시대라고 해서 시를 시로, 노래를 노래로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 시를 쓰는 순간, 사진을 찍는 순간, 그림을 그리는 순간, AI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순간은 모두 다른 사고의 시간이다.
같은 사람 안에서 흐르는 시간이지만, 결이 다르다.
어떤 시간이 지금 내 표현에 필요한가.
그것이 매체를 고르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매체 실천을 자기 분열로 보지 않는다.
표현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자기 조직으로 본다.
시인이 시 하나로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없듯, 사진가가 필름 하나로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진가가 AI 하나로 모든 것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매체는 작가를 가두는 방이 아니라, 작가가 드나드는 작업실이다.

다만, 매체의 기억은 가벼이 두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필름 고집파의 정직한 동기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사진의 지표성, 곧 카메라 앞에 무엇인가가 실제로 빛을 반사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증언의 무게다.

또 한 가지,
AI 이미지 생성이 작가들의 노동 위에 무단으로 서 있고,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이다.
필름의 노동, 인화의 시간, 한 장의 사진에 들어간 손의 흔적은 그 자체로 윤리적 자세다.
나는 이 자세를 존중한다.

내 입장은 그 자세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세가 매체의 종류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윤리는 매체의 선택에 동봉되어 오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쓰는 방식에 깃든다.
디지털로도 정직할 수 있고, AI로도 노동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도구가 자세를 결정하지 않는다.
작가가 자세를 도구에 새긴다.

그래서 나는

필요할 때 카메라를 든다.
필요할 때 Photoshop을 연다.
필요할 때 AI를 부른다.
어떤 때는 카메라 대신 펜을 든다.
어떤 때는 펜 대신 목소리를 낸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침묵이 가장 정확한 매체일 때가 있다.

매체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나의 표현이 매체를 고른다.

진정성은 매체의 순도에 있지 않다.
어떤 매체를 골랐든, 그 선택이 내가 묻고 있는 질문에 정확히 응답하고 있는가?.
진정성은 거기에 있다.
필름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 그 작업에 필름이 정확한 것이다.
AI가 부정직한 것이 아니라, 그 작업에 AI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매체의 다름은 위계가 아니다.
결의 다름이다.
결을 읽는 안목이 작가의 일이다.
매체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 아니라.

AI 시대에 사진가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매체의 수가 늘었고,
선택의 무게가 늘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곧 자유의 다른 얼굴이다.
매체가 많아진 만큼,
내 표현이 정확히 자기 자리에 닿을 가능성도 늘어났다.

나는 그 가능성을 매체의 순수성으로 좁히고 싶지 않다.
정확성으로 넓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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