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작가? - 실력만 좋다고 뜰 수 있을까?

여는 이야기 — 실력만 좋으면 뜰까?

질문 하나로 시작하겠습니다. 똑같이 훌륭한 두 작가가 있습니다. 실력도, 성실함도, 작품 수도 판박이입니다. 딱 하나만 다릅니다.
한 명은 이름난 미술관에서 데뷔했고, 다른 한 명은 동네 작은 카페에서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10년 뒤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좋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면 언젠가 알아준다"고 믿습니다.
낭만적이고, 듣기 좋고,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2018년 세계 최고 학술지 Science에 실린 이 논문은 그 믿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데이터로 뜯어보니, 성공을 가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작품의 '질'이 아니라 '어디서 시작했는가'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일수록 알아 두면 무기가 됩니다.
오늘은 이 연구를 수학 하나 없이, 공항과 눈덩이와 단골집 이야기로 풀어 보겠습니다. 다 읽고 나면 미술계라는 게임의 '숨은 규칙'이 보일 것입니다.






왜 하필 미술을 연구했을까? — 측정 불가능성의 역설

이 연구를 이끈 팀은 원래 '성공의 과학'을 파고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수많은 분야 중 미술을 고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미술이야말로 '좋음'을 객관적으로 재기가 가장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논문은 렘브란트(Rembrandt)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오늘날 누구도 렘브란트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무슨 자로 잽니까? 붓질의 개수로 잴까요, 물감의 무게로 잴까요? 잴 수 없습니다.
미술의 가치는 보는 사람의 감정과 안목에 기댑니다. 그래서 "좋으니까 떴다"는 설명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좋음 자체를 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연구팀은 질문을 뒤집습니다. 작품의 좋음을 못 재겠다면, 대신 작가가 '어디를 거쳐 갔는지'를 재 보자.
그 경로가 성공을 얼마나 설명하는지 보자. 이 발상의 전환이 이 논문 전체를 끌고 갑니다.



이 논문이 실제로 한 일

연구팀은 낭만이 아니라 숫자로 승부했습니다.
전 세계 미술 전시와 경매 기록을 몇 년에 걸쳐 긁어모았습니다. 규모가 상상 이상입니다.
갤러리 전시 약 49만 8천 건, 미술관 전시 약 29만 건, 경매 기록 약 12만 7천 건입니다.
여기서 무려 49만 6천 명 작가의 발자취를 복원했습니다.
143개국, 1980년부터 2016년까지, 36년 치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36년간 세계 미술계에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시했는지"를 거의 전부 모아 한 장의 거대한 지도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도 위에서 작가 50만 명의 인생 경로를 하나하나 따라갔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지금까지 "미술계 성공"은 소문과 감의 영역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인맥으로 떴대", "재능이 남달랐지" 같은 말은 많아도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 논문은 처음으로 50만 명 규모의 진짜 발자국을 증거로 들이밀었습니다.
개인의 인상이 아니라 통계가 말하게 한 것입니다.



이 연구는 어떻게 나왔나? —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렌즈

이 논문을 이끈 사람 중에는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분야를 세운 학자도 있습니다.
네트워크 과학은 세상만사를 '점과 선'으로 보는 렌즈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도시와 도시의 도로, 세포 안 단백질의 상호작용까지, 연결로 이뤄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같은 수학으로 들여다봅니다.



이 렌즈의 힘은 '숨은 구조'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하나하나 보면 안 보이던 패턴이, 전체를 연결로 그리면 불쑥 나타납니다.
왜 어떤 공항이 허브가 되는지, 왜 어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지가 그렇게 설명됩니다.
연구팀은 바로 그 렌즈를 미술계에 갖다 댔습니다.
그러자 '누가 왜 뜨는가'라는 오래된 수수께끼가 지도 위 구조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핵심 도구 — '공동전시 네트워크'를 공항 노선도로 이해하기

이 논문의 심장은 '공동전시 네트워크'라는 지도입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공항 노선도와 똑같습니다.

공항을 떠올려 보십시오. 인천, 뉴욕, 런던 같은 '허브 공항'은 노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어디로든 갈아탈 수 있습니다. 반면 작은 지방 공항은 연결편이 하루 몇 편뿐입니다. 큰 데로 가려면 몇 번을 갈아타야 합니다.



미술계도 똑같습니다. 여기서 '공항'은 미술관과 갤러리입니다. 그리고 '항공편'은 놀랍게도 작가 자신입니다.
한 작가가 A 미술관에서 전시한 뒤 B 미술관에서 전시하면, 그 작가가 A와 B 사이에 항공편 하나를 띄운 셈입니다.
이런 이동을 전 세계에서 전부 합치면 기관과 기관이 촘촘히 연결됩니다.



논문은 이렇게 무려 1,900만 개의 연결선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니 몇몇 큰 기관에 노선이 미친 듯이 몰려 있었습니다.
좋은 작가들이 그리로 이동하고, 그 이동이 다시 그 기관을 더 중요한 허브로 만드는 구조입니다.
미술계에도 인천공항 같은 곳이 있다는 뜻입니다.



명성은 어떻게 재는가? — 친구의 친구가 유명하면 나도 유명하다

그럼 어떤 미술관이 '명성 높은 허브'일까요?
논문은 간단하면서도 영리한 방법을 씁니다.
"유명한 곳과 많이 연결된 곳이 유명한 곳"이라는 원리입니다.

우리 일상으로 바꿔 보겠습니다.
팔로워가 많다고 다 영향력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 나를 팔로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명인 열 명이 나를 팔로우하면, 팔로워 총수와 상관없이 내 영향력은 확 올라갑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과 이어지면 내 영향력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수학에서는 이걸 '고유벡터 중심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뜻은 딱 하나입니다.
"끼리끼리 유명하다." 유명한 기관과 많이 이어진 기관이 곧 유명한 기관입니다.

연구팀은 이 계산이 탁상공론이 아님을 두 번 확인했습니다.
첫째, 전문가들이 A부터 D까지 매긴 기관 등급 9천여 개와 비교했더니 딱 들어맞았습니다.
A급은 지도 위쪽, D급은 아래쪽이었습니다.
둘째, 경매에서 실제로 비싸게 팔리는 순위와 비교했더니 상관계수가 0.88이었습니다.
1이면 완벽히 일치인데 0.88이면 아주 높은 편입니다. 즉 네

트워크가 계산한 명성은 현실의 권위와 돈을 정확히 맞혔습니다. 지도가 진짜였던 것입니다.



발견 1 — 첫 단추가 평생을 정한다

이제 진짜 이야기입니다. 연구팀은 작가의 '처음 다섯 번 전시'에 주목했습니다.
이 초반 다섯 걸음이 평균적으로 상위 20% 기관이면 '좋은 출발', 하위 40%면 '약한 출발'로 나눴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좋은 출발을 한 작가의 58.6%가 커리어 끝까지 상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절반이 훌쩍 넘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바닥권(하위 40%)으로 추락한 비율은 겨우 0.2%였습니다.
사실상 한번 위에 올라가면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반대편은 가혹합니다.
약한 출발을 한 작가 중에서 나중에 상위 20% 기관에 올라선 사람은 겨우 10.2%였습니다.
열에 아홉은 끝내 문턱을 못 넘었습니다.

버티는 힘도 달랐습니다.
데뷔 10년 뒤에도 여전히 활동 중인 비율이, 좋은 출발 그룹은 39%였는데 약한 출발 그룹은 14%에 그쳤습니다.
좋은 출발은 더 오래 살아남기까지 했습니다.

첫 다섯 걸음.
그게 평생의 무대를 거의 정해 버립니다.
첫인상이 사람 관계를 좌우하듯, 첫 전시가 커리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발견 2 — 눈덩이 효과, 부익부 빈익빈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잠김'이라 부르는 눈덩이 효과 때문입니다.

좋은 기관에서 전시하면, 그 기관과 연결된 다른 좋은 기관들이 나를 알아보고 초대합니다.
좋은 무대가 다음 좋은 무대를 부릅니다.
언덕에서 눈덩이가 굴러가며 저절로 커지듯, 명성이 명성을 낳습니다.
반대로 약한 곳에서 출발하면 비슷하게 약한 곳들만 계속 이어집니다.
위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같은 높이를 맴돕니다.

단골집으로 비유해도 좋습니다.
좋은 동네에 첫 가게를 내면 손님도, 소개도, 다음 기회도 그 동네 수준으로 들어옵니다.
외진 곳에 내면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그 사실이 좋은 동네까지 소문나기가 어렵습니다.

연구팀은 이걸 컴퓨터로 재현해 봤습니다.
작가가 다음에 어느 급 기관으로 갈지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었는데,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단순 모델은 현실의 눈덩이 효과를 못 맞혔습니다.
그런데 '지난 전시들의 평균 명성을 기억하는' 장치를 넣자 현실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과거 약 12번의 전시가 다음 행선지를 좌우하는 '기억'으로 작동했습니다.
미술계가 작가의 이력서를 기억하고, 그 기억이 다음 문을 여닫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이력이 이력을 부른다"는 말이 데이터로 증명된 셈입니다.



발견 3 — 뜨는 사람은 첫 10년에, 그리고 '다양하게' 움직였다

그럼 약한 출발을 한 사람은 영영 방법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소수는 실제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뚜렷한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이야기에서 가장 희망적인 대목입니다.

첫째, 타이밍입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도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커리어 첫 10년 안에 그 도약을 해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은 점점 닫힙니다.
데뷔 초반 10년이 진짜 승부처라는 뜻입니다. 뒤늦게 뒤집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둘째, 다양성입니다.
치고 올라간 작가들은 초기에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기관에 노출됐습니다.
한 우물만 파지 않았습니다.
종류가 다른 무대, 다른 도시, 다른 관객 앞에 넓게 섰습니다.
논문의 숫자로도 이들이 거쳐 간 기관의 폭이 훨씬 넓었습니다.
좁고 깊게가 아니라, 초반에는 넓게 퍼지는 편이 도약의 발판이 됐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노선을 뚫어 둔 작은 공항이, 어느 날 큰 허브와 연결될 확률이 높았던 것입니다.



발견 4 — 태어난 곳이 출발선을 바꾼다

불편한 발견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작가가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따라 출발선 자체가 달랐습니다.

지도를 보니, 유럽과 북미의 주요 기관들이 촘촘한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서로 직항으로 빽빽하게 연결된 허브 무리입니다.
반면 아시아, 남미, 호주 등지의 기관들은 자기들끼리는 잘 뭉쳐 있어도 그 중심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세계 항공망에서 몇몇 허브만 서로 직항으로 이어지고 나머지는 변두리에 놓인 것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연구팀은 여기서 중요한 가정을 답니다.
"재능은 태어난 나라와 상관없을 것이다.
" 인도에서 태어나든 독일에서 태어나든 타고난 재능의 분포는 비슷할 텐데, 출발선의 명성이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면 그건 실력 차이가 아니라 '접근 기회'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계 미술계에는 눈에 안 보이는 지리적 유리천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고칠 방법은 없을까? — 논문이 내놓은 처방

여기서 이 논문이 멋진 이유가 나옵니다.
문제만 지적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해법도 제안합니다.

연구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추첨' 방식입니다.
좋은 기관의 문 일부를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제비뽑기처럼 열어 주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블라인드 심사'입니다.
이건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예전 오케스트라 단원 선발에서, 연주자를 커튼 뒤에 두고 소리만 듣고 뽑았더니 여성 단원 비율이 크게 올랐습니다.
이름과 배경을 가리자 실력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미술계도 그렇게 출신과 이력을 가리고 작품만 보면, 숨은 재능이 더 공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돈 이야기 — 4.7배와 5.2배

명성은 결국 돈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좋은 출발을 한 작가의 작품은 약한 출발을 한 작가보다 경매에 4.7배 더 자주 나왔습니다.
그리고 최고가는 5.2배 더 높았습니다.

같은 재능이라도 출발 위치에 따라 작품값이 다섯 배 차이가 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냉정하지만, 이게 데이터가 보여 준 현실입니다.
예술의 가격표는 붓끝에서만 정해지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이 걸린 벽의 '주소'에서도 정해집니다.



통념 대 데이터 — 무엇이 뒤집혔나

이 논문이 특히 통쾌한 건, 우리가 은근히 믿던 통념 몇 개를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통념 하나.
"결국 실력이 이긴다." 데이터는 말합니다.
실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위치가 실력의 발현을 돕거나 막는다.

통념 둘.
"좋은 작품은 언젠가 발견된다."
데이터는 말합니다. 발견에는 시효가 있다.
대부분의 도약은 첫 10년에 일어난다.

통념 셋.
"한 우물을 깊게 파라." 데이터는 말합니다.
적어도 초반에는 넓게 퍼진 사람이 더 자주 도약했다.

통념 넷.
"미술계는 취향의 세계라 규칙이 없다."
데이터는 말합니다. 취향의 세계에도 통계적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읽어낼 수 있다.



공정하게 — 이 논문의 한계도 봅시다

똑똑한 독자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논문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세 가지만 짚겠습니다.



첫째, 이 연구가 본 '성공'은 갤러리·미술관·경매라는 제도권 안의 성공입니다.
관객에게 준 감동, 사회적 영향, 새로운 실험 같은 가치는 이 숫자에 잡히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서 퍼포먼스처럼 사고팔기 어려운 예술은 데이터에서 빠져 있습니다.

셋째, "초기 접근이 성공을 만든다"는 해석에는 '측정 못 한 실력'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데서 출발했을 가능성을 100%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논문을 "실력은 필요 없다"로 읽으면 완전한 오독입니다.
정확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실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위치와 연결이 실력만큼, 때로는 그 이상 중요하다."



AI 이미지 작가에게 이 논문이 특히 말해 주는 것

이 연구는 전통 미술계를 다뤘지만, 미드저니로 작업하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울립니다.
몇 가지만 옮겨 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공항'이 조금 다릅니다. 갤러리만이 무대가 아닙니다.
어떤 플랫폼에 올리는지, 어떤 커뮤니티에 속하는지, 어떤 공모와 온라인 전시에 참여하는지가 우리의 '첫 무대'입니다.
온라인은 오히려 기회입니다.
지리적 유리천장을 넘어 세계의 허브와 곧장 이어질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리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첫째, 초반 노출의 '질'을 신경 쓰십시오. 아무 데나 많이 올리는 것보다, 눈 밝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제대로 올리는 한 번이 더 큽니다.
둘째, 초반에는 다양하게 퍼지십시오. 한 커뮤니티에만 머물지 말고 성격이 다른 여러 곳에 노출되는 편이 도약 확률을 높입니다.
셋째, 연결을 의식하십시오. 좋은 작가들, 좋은 큐레이터들과 이어지는 것이 곧 다음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넷째, 초반 몇 년을 밀도 있게 쓰십시오. 이 논문이 말한 '첫 10년'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실천 체크리스트 — 오늘부터 할 수 있는 것

거창한 전략 말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목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 내 '첫 다섯 걸음'을 의식적으로 고른다. 다음 참여할 공모·전시·플랫폼을 아무 데나 정하지 않는다.
둘, 노출의 종류를 섞는다. 같은 성격의 채널만 반복하지 않고, 결이 다른 곳 한두 개를 일부러 추가한다.
셋, 좋은 사람 세 명과 진짜로 연결된다. 팔로우만이 아니라 대화·협업·추천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만든다.
넷, 초반 밀도를 높인다. 완벽한 한 방을 오래 기다리기보다, 좋은 시도를 자주 한다.
다섯, 기록을 남긴다. 내 이력이 곧 다음 문을 여는 '기억'이 되므로, 참여와 성과를 정리해 둔다.







잠깐, 이야기로 느껴 봅시다 — 두 작가의 10년

가상의 두 사람을 그려 보겠습니다. 지수와 현우, 둘 다 스물다섯에 데뷔했고 실력은 막상막하입니다.

지수는 첫해에 규모는 작아도 안목 높은 기획전 두 곳, 성격이 다른 그룹전 세 곳에 참여했습니다. 무
대의 결이 제각각이라 만나는 사람도 다양했습니다.
그중 한 큐레이터가 지수를 더 큰 전시에 불렀습니다.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현우는 첫해에 집 근처 비슷한 카페 갤러리 다섯 곳에서 성실하게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작품은 훌륭했지만, 다섯 무대가 다 비슷했고 오는 사람도 늘 비슷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그 동네를 넘지 못했습니다.



5년 뒤, 지수는 중견 기관의 초대를 받는 작가가 되어 있었고 현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실력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첫해에 '어디에, 얼마나 다양하게' 섰는가의 차이였습니다.
이 논문이 50만 명에게서 발견한 패턴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한 줄 정리

미술계의 성공은 '무엇을 그렸나'만큼이나 '어디서 시작해 누구와 이어졌나'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운이 아니라 설계할 수 있다.



숫자로 한눈에 보기

작가 규모: 약 49만 6천 명, 143개국, 1980–2016년.
기관 연결선: 1,900만 개 이상.
명성 계산의 신뢰도: 경매 가격 순위와 상관 0.88.
좋은 출발의 위력: 상위권 잔류 58.6%, 바닥 추락 0.2%.
약한 출발의 벽: 상위 진입 겨우 10.2%.
생존율 차이: 10년 뒤 활동 39% 대 14%.
돈의 격차: 경매 빈도 4.7배, 최고가 5.2배.
도약의 조건: 첫 10년, 그리고 다양한 초기 노출.
미술계의 기억: 과거 약 12번의 전시가 다음 문을 좌우.



자주 나오는 질문

질문. 그럼 실력은 소용없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실력은 입장권입니다. 다만 입장권만으로는 좋은 자리에 앉지 못합니다.
자리를 정하는 건 위치와 연결입니다. 실력에 더해 연결을 챙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질문. 늦게 시작하면 끝난 건가요?
아닙니다. 도약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초반 10년을 다양하고 밀도 있게 썼습니다.
늦었다고 느낄수록 '넓게, 빠르게, 좋은 곳으로'가 답입니다.



질문. 왜 하필 '다섯 번' 전시로 초기를 판단하나요?
연구팀이 정한 기준입니다.
데뷔 직후 몇 걸음을 초기 신호로 본 것인데, 처음 다섯 번의 평균 무대 수준이 이후를 놀랄 만큼 잘 예측했습니다.



질문. 이건 서양 미술계만의 이야기 아닌가요?
데이터는 전통 갤러리·미술관·경매 중심이라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위치가 경로를 잠근다'는 원리 자체는 온라인 시대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질문. 그럼 좋은 첫 무대는 어떻게 알아보나요?
완벽한 공식은 없지만 힌트는 있습니다.
그곳이 '좋은 다른 곳들과 이어져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 공간에서 전시했던 작가들이 이후 어디로 갔는지를 살피면, 그 무대의 연결력이 보입니다.



질문. 다양하게 퍼지라면서 왜 아무 데나 올리지 말라고 하나요?
서로 모순 아닌가요? 좋은 지적입니다.
핵심은 '질 높은 곳들 사이에서 다양하게'입니다.
아무 곳에나 많이가 아니라, 좋은 무대들을 여러 결로 섞으라는 뜻입니다.
방향은 위로, 폭은 넓게입니다.



미니 용어사전

네트워크: 점(기관)과 선(작가의 이동)으로 이뤄진 연결 지도.
공동전시 네트워크: 같은 작가가 거쳐 간 기관들을 이어 만든 미술계 지도.
명성(고유벡터 중심성): "유명한 곳과 많이 이어지면 유명하다"는 계산법.
잠김 효과: 좋은 출발이 좋은 다음을 부르는 눈덩이 현상. 부익부 빈익빈.
경로의존성: 처음 밟은 길이 이후 경로를 계속 제약하는 성질.
중심부와 주변부: 서로 촘촘히 이어진 허브 무리(중심부)와 거기서 멀리 떨어진 기관들(주변부).
중심성: 네트워크에서 한 점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를 재는 값.
허브: 연결이 유난히 많이 모이는 중심 지점. 미술계의 인천공항 같은 곳.



마치며

이 논문은 우리에게 냉정한 지도를 쥐여 줍니다.
지도가 냉정하다고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지도가 있어야 길을 고를 수 있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당연한 일에 더해, '어디서 시작하고 누구와 이어질지'를 함께 설계하는 것.
그것이 이 연구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실용적인 선물입니다.
재능은 씨앗이고, 연결은 그 씨앗이 뿌리내릴 토양입니다.
둘 다 가꾸시기 바랍니다.



출처와 정확도 메모

이 글은 원 논문의 저자 공개본과 PubMed 초록으로 확인한 내용을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큰 수치(작가 49만여 명, 143개국, 상위권 잔류 58.6%, 상위 진입 10.2%, 경매 4.7배·5.2배, 상관 0.88, 기억 12회)는 원문에서 확인했습니다.
더 세밀한 수치를 그대로 인용해 발표하실 분은 원문 PDF를 한 번 더 대조하시기를 권합니다.



원 논문:

Fraiberger et al. (2018), Science 362(6416):825–829. DOI: 10.1126/science.aau7224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au7224?utm_source=chatgpt.com

https://www.science.org/doi/epdf/10.1126/science.aau7224






추신:
제가 걷고자 하는 방향과 비슷한 이야길 하는 논문을 찾아 기쁩니다.
작년 Paris Photo - 관람하고 나서 느꼈던 결을...
- 이 논문에서 다시 한번 더 느껴 봅니다 (2018년 발표된 논문인데...)

논문을 분석하고..., 제 위치를 판단해 보곤..., 생각이 많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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