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되지 않은 것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진부한 이유가 있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멈추니까 보이는 것

40년 넘게 연구실에 있었다.

분자 수준의 데이터를 읽고,
논문을 쓰고,
학생을 가르쳤다.

그 시간 동안 현미경 밖의 세상은 늘 거기 있었지만,
볼 여유가 없었다.

은퇴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인 것이 아니라 — 세상이 처음 보였다.

골목의 빛.
계절이 바뀌는 냄새.
밥상 위 김이 피어오르는 모양.
전부 늘 거기 있었다.

내가 보지 않았을 뿐이다.

잊혀진 사랑의 기억, 그리고 그 너머

사진과 AI 이미지를 시작하면서,
나는 "기억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잡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나를 키워 주셨는데,
그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주를 키우면서 비로소 — 소급적으로 — 할머니의 마음이 보였다.

그런데 최근 깨달은 것이 있다.
이것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전공에 몰두하느라 못 본 것들.
너무 바빠서 지나친 일상의 순간들.
지하철 노인석에 앉았을 때,
조용한 아파트 사잇길을 걸을 때,
아버님 점심 식사 전후 설거지 할 때,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떠오르는 생각들.

손주를 키우며 느끼는,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들.

60/70대 사진작가분들 앞에서 강의하며 발견하는,
대학원생과는 전혀 다른 배움의 풍경.

전부 같은 뿌리다.
"늘 거기 있었는데,
보지 못한 것."

할머니의 사랑은 이 큰 주제의 한 장(chapter)이었다.
전부가 아니었다.

시각적 언어를 찾는다는 것

작가에게는 자기만의 시각적 언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을 배우고자 여러 군데 돌아다녔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아직 못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시각적 언어는 머리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반복하면서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많이 만들고,
그중에서 "자꾸 눈이 가는 것"을 고르고,
왜 그것이 눈에 들어오는지 한 줄을 쓴다.
그 한 줄이 쌓이면 패턴이 보이고,
그 패턴이 곧 나의 언어가 된다.

잘 만든 이미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자꾸 보게 되는 이미지를 고르는 것이다.
Barthes가 말한 punctum — 설명할 수 없는데 찔리는 것 — 이 바로 그것이다.

가르치는 것이 가장 빠른 배움이다

AI Art Academy에서 기초반, 심화반, 작가반을 운영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수강생에게 "빛이 사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하려면,
내가 먼저 빛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Caravaggio의 어둠,
Vermeer의 창문빛,
Monet의 시간을 이야기하려면,
내 사진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나의 시각적 언어를 정리하는 과정이다.

다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강의를 준비하고,
커리큘럼을 설계하고,
슬라이드를 만드는 시간이 쌓이고,
강의를 하러 먼길 가다 보면 — 정작 내 이미지를 만드는 시간은 남지 않는다.

가르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또 하나.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교실 안의 온도가 내 기대와 다를 때가 있다.
배우러 온 사람과 모이러 온 사람은 다르다.
그 차이를 느끼는 순간 김이 빠진다.

전공 연구할 때보다 더…,
시간과 열정을 쏟는데 — 그만큼의 진지함이 돌아오지 않을 때,
계속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아직 답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작업은 직접 이미지를 만들고,
고르고,
왜 이것인지를 묻는 시간에서만 자란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이 먼저다.

보는 눈을 기르는 법

사진집을 본다.
그림책을 본다.
다만 아무거나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과 맞닿는 작가를 골라서 본다.

Saul Leiter — 창문과 비 뒤에 숨은 세상. 가려진 것이 오히려 본질을 드러내는 구조.

Rinko Kawauchi — 빛방울, 곤충 날개, 아이의 손. 멈추면 보이는 미세한 것들.

Vilhelm Hammershøi — 텅 빈 방, 뒷모습,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강한 순간.

책을 넘기다 손이 멈추는 페이지가 있다.
왜 멈췄는지 모른다.
그 "왜"를 모르는 채로 포스트잇을 붙인다.
한 권을 다 보고 포스트잇 붙은 페이지만 다시 펼치면 — 거기에 내 눈이 들어 있다.

남의 스타일을 따라가게 될까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만 보면 따라가고,
열 사람을 보면 그 안에서 나만 반응하는 것이 남는다.
그 남는 것이 나의 것이다.

걱정할 것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보는 것이다.

기억, 사진, 그리고 AI

Barthes의 punctum은 Proust의 비자발적 기억과 같은 구조다.
마들렌 과자 한 입에 잃어버린 시간 전체가 밀려오듯,
사진 한 장이 잊고 있던 기억을 촉발한다.

Marianne Hirsch는 이것을 postmemory라 불렀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전 세대의 기억을,
사진을 통해 내면화하는 것이다.

내가 할머니의 사랑을 손주를 키우며 소급적으로 깨달은 것 — 이것이 정확히 postmemory의 작동 방식이다.

그리고
David Bate는 AI 시대에 이 모든 기억이 합성(composite)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AI는 존재한 적 없는 장면의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가짜인가?
아니면 — 늘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조건인가?

Cross-polarized light 아래에서 평범한 얼음이 강렬한 색을 드러내듯,
AI라는 조건 아래에서 내 안의 기억이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주제를 하나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주제가 나를 데려간 곳은 더 넓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랑"에서 "인식되지 않은 것들"로.
“The Unnoticed”.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평생에 걸친 시리즈다.

할머니의 사랑,
골목의 빛,
멍하니 앉아 있을 때 떠오르는 것들,
은퇴 후에야 보이는 세상 — 각각이 한 챕터가 되고,
모이면 하나의 작품 세계가 된다.

아직 시각적 언어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방향은 보인다.

많이 만들고,
자꾸 눈이 가는 것을 고르고,
왜인지를 묻는다.
그것을 반복한다.

목표는 선명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의와 작업 사이에서,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 매주 흔들린다.
그래도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언젠가 패턴이 보일 것이다.
그때 뒤돌아보면 —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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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대구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리고 4월 첫 주 기초반/심화반/작가반 강의를 끝내며…
정리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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